생명이란 무엇인가? 또한 인간의 생명은 왜 존엄한가? 먼저 생명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이에 대하여 과학자가 아닌 분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온 의견은 생명이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혹은 먹고 대사활동을 한다, 꿈 혹은 목표 희망을 뜻한다 등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본인이 생명과학분야에 몸 담은 지 40년 이상 지났고, 대학에서 현재 학생들에게 생명과학 과목을 가르치고 있기에 이 질문을 받았더라면 생명체는 다음과 같은 과학적인 특징이 있다고 대답 했을 것이다. 이는 동물, 식물, 미생물에게 모두 해당되는 사실이다.

첫째로는 생명체는 세포로 구성된 조직이 있고, 둘째로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물질대사를 하며, 셋째로는 생체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는 점이며, 넷째로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고, 적응하며 (어떤 교과서에서는 이를 진화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중요한 생명체의 특징인 생식에 있다. 즉 자손을 증식시키되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는 특징이며, DNA와 같은 유전정보가 대대로 전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이들은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현상일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성장하며 운명적으로 죽게 되어 있다. 또한 이 다양한 생명체는 어디에서 왔으며, 죽은 후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기독교인으로서 그 답은 생명체를 창조하신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땅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하늘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땅에 속한 생명의 속성으로는 육체, 혼 등을 말하며, 하늘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영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인가? 언제 사람은 영혼을 소유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인가? 물론 뱃속의 태아와 태어난 아기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으며, 사람들마다 혹은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한 것 또한 사실이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은 출산과 동시에 주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10달을 자라다가 나왔다고 하고, 서양에서는 이를 9달이라고 한다. 물론 만 9달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많게 1-2주까지의 오차는 있겠지만 과학적으로는 자궁에서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후, 그 세포가 자라기 시작하여 266일 정도 있다가 이 세상에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민족은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여 "백일잔치"를 베푸는 풍습이 있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두 가지만 생각해 보자.

첫째로는 출생 후 3달 정도가 되면 면역체계가 완비되어 100일을 지난 아기는 생존의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를 축하해 왔던 것이다. 둘째로는 100일 잔치하는 날을 기준으로 하여 대략 1년 전에 태아가 잉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날을 진짜 생명이 잉태된 생일로 기념하는 것이다. 이미 이야기한바와 같이 임신기간 266일에 100일을 더하면 거의 1년이 되는 날짜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태아를 이미 생명으로 간주하고 이를 뱃속에서부터 교육시켜 왔으며(이를 태교라고 한다), 그렇기에 태어나자마자의 아기를 1살로 생각하는 귀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생명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 생명과학자의 눈으로 본 창세기 천지창조 사역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창조를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절정에는 물론 인간의 창조가 있다. 또한 창세기 1,2장에서는 창조라는 동사가 매우 특별하게 사용이 되고 있다. 창세기 2장3절에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다"라는 기록이 있다. 나는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한 후에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무엇을 만드시고 무엇을 창조하셨는가?" 위에서 언급한 창세기 2장 3절의 말씀에 근거해 창세기 1장의 경우에는 '창조하다'와 '만들다'가 특별히 구분되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 3절이 1장의 창조 행위의 실질적인 마무리 문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세 군데에서만 창조라는 단어를 썼을까?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동사 '만들다'와 '창조하다'의 차이점에 대해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만들다'는 '창조하다'를 포함하는 더 큰 의미의 단어이며, '창조하다'는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셨지만, 구체적으로는 창조하신 것이다. 즉 창조는 무에서 유로 한 차원 더 높은 그 무엇의 만듦을 의미한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creatio ex nihilo; creation out of nothing)이 창조이며, 이미 만들어진 것을 다른 것으로 변형시켜 만들거나 발전시키는 것이 만듦이다. 

말하자면 목수는 나무로 탁자를 만들고, 예술가는 작품을 창조한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만드셨지만 구체적으로는 창조 행위를 하신 것이다.

태초 창조의 과정에서 동사 '창조하다'가 어떤 경우에 쓰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1장에서 창조(히브리어로는 bara; 영어로는 create)라는 동사가 사용될 마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창조가 이루어져 왔다. 제1일에 창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공백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물질, 시간, 공간의 창조'이었으며, 제5일에 창조된 것은 짐승이 가지고 있는 '혼(혹은 의식)의 창조'이고, 제6일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의 창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나머지의 경우에는 만들다(히브리어로는 assa; 영어로는 make)라는 동사가 사용이 되었다. 물질을 창조하셨으며, 미생물과 식물은 만드셨고, 짐승은 창조하셨다. 창세기의 기록에는 미생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후에 포도주와 관련된 이야기와 출애굽기와 신약에서 누룩, 즉 효모(yeast)에 대한 언급이 있다. 본인의 연구실에서도 누룩의 생화학적인 생명현상을 연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미생물이 얼마나 빨리 성장하고 전파되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33에는 이런 누룩의 퍼짐을 하나님 나라의 전파로 비유하는 놀라운 기록이 있다.

첫째, 제1일 "천지를 창조"(창 1:1)하셨다. 즉 하나님은 무의 상태에서 물질(matter)을 창조하셨다. 전 우주에 존재하는 물체는 이 물질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4일까지 이 물질을 재료로 하여 지구와 무생물 및 식물이 만들어졌다.

둘째, 제5일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창 1:21)하셨으며, 이는 물질세계보다 한 차원 높은 영역의 혼(soul)이 창조된 것이다. 동물은 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하나님은 바다짐승, 물고기와 새를 만드시면서 혈육 있는 생물, 즉 뇌가 있으며 피가 흐르는 동물의 육신에 혼을 넣어 주셨다. 혼이란 느낌, 인지, 인식, 감각 등의 지각 능력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능(intelligence)을 포함하며 인간과도 교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신성한 것이며 종교에 따라 살생을 금하기도 한다.

셋째, 제6일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창 1:27)하셨다. 인간의 영(spirit)이 창조된 것이다. 혼과 영은 다른 차원의 영역에 있다. 영은 혼보다 더 고차원적인 세계에 속한다. 영의 기능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동물과 차별되도록 차원 높게 창조하신 속성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식(God consciousness)하고 그와 교제(Spiritual communication)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영과 혼을 혼용하여 쓰는 경우가 많으며 일반적으로 영혼이라고 함께 쓴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쓰인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창조하다'와 '만들다'를 혼용하는 경우와 유사하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통하여, 사람이 영과 혼과 육을 가진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강림 이후 다음 성경 구절이 확실하게 이를 증거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그렇다면 다른 생명체와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가? 과학의 생명의 정의와는 다르게 생명의 성경적 정의는 "피"의 유무에 달려 있다(창 9:4, 레17:11). 혼 즉 의식, 느낌, 인지 및 지각능력이 있는 동물은 대개 피가 흐르고 있으며, 혼을 가진 존재이다. 식물이나, 미생물 혹은 붉은 피가 흐르지 않는 하등동물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며, 물론 이 생명체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임은 이미 이야기 한바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짐승을 만드실 때에 혼을 창조하심으로 다른 생명체와 구별을 하셨다. 영혼육은 생령과 의식과 물질로 대입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차원으로 창조된 거룩한 속성이며 인간만이 세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이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인간은 존엄한 존재로 배워 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존재이며(창 1:26), 인간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선포하고 있다(데살로니가전서 5:23, 욥기12:10). 인간만이 하나님을 주권자로 알아볼 수 있는 '영'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하나님이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생명으로 오셨으며, 우리 죄를 씻기 위해 피 즉 생명을 희생하며 돌아가신 "보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영은 거듭나게 되며,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생명의 영"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생명"을 입고 오신 그 의미와 "영원한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진정으로 소망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남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 이 내용의 일부는 "과학자의 눈으로 본 창세기"(두란노 간, 김준 저, 2016)에서 발췌됨.

김준 고려대 생명과학부 교수, 현 한국미생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