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북 IVP
▲새로 제작된 <한나의 아이> 무선본. ⓒ이대웅 기자
본 서평은 페이스북 페이지 '신학서적중고장터'의 독서 지원 프로그램에 의한 것입니다. <한나의 아이>는 최근 무선본이 출간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Stanley Hauerwas, Hannah's Child: A Theologian's Memoir

한나의 아이
스탠리 하우어워스 | 홍종락 역 | IVP | 544쪽 | 25,000원

1.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기

우리는 대체로 인생 속 많은 사건들을 '영문도 모른 채' 당한다. 이런 표현이 올바른지는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인생들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인생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인 것 같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더 심해진 우울과 불안을 견뎌가며 내 삶을 이어가야 했고, 한 친구는 '가장 최악의 타이밍에 가장 최악의 일을 터뜨리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가장 피하고 싶던 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나의 가장 친애하는 친구는 '요즘 우울하지 않아서 너무 우울하다'는 생각을 곧장 하고는 하는데, 그에게 삶이란 이 우울함을 견디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고, 내가 '왜 괴로운가'를 물으며 살지만, 우리는 그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며(39쪽),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지 못했고(104쪽), 아내인 앤이 처음으로 정신 발작을 일으켰을 때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231쪽).

스탠리의 인생은 그야말로 '어쩌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된 사람'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수십 년간 신학을 실천해온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생 속 많은 사건들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저 그 삶을 견뎌온 사람이며, 그 이야기가 이 책 『한나의 아이』에 담겨 있다. 때문에, 우리와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온 이 신학자에게서 '견뎌나가는 인생'을 조금 참고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2. 하우어워스가 견뎌야 했던 것

누구나 자신만의 '견뎌야 하는 것'이 있다. 스탠리에게도 있었다. 책 챕터 중 두 챕터의 제목이 각각 '살아남기'와 '견디기'인 것만 봐도, 그의 인생 역시 견뎌 나가는 것의 연속임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인생을 절망적으로 몰아넣은 것을 꼽자면, 단연 아내 앤의 양극성 장애일 것이다. 앤의 병세가 악화될수록, 스탠리는 그야말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려고 애썼다. 그는 앤을 보살피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마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이런저런 약을 먹고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지만, 그런 희망은 비현실적인 경우가 너무 많다. 희망 없이 살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정신 질환자의 가족은 기대를 접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5분 뒤에 어떤 일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279쪽)".

스탠리는 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했다. 하지만 대부분 무위로 돌아갔다. 그가 "내가 무슨 일을 하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고 회고할 만큼, 앤을 향한 그의 정성은 그리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앤은 초조성 우울증과 잦은 조증 삽화(episode)를 앓았다.

때문에 스탠리는 느닷없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으니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 건 간통이라 말하는 앤을 감당해야 했고, 벌레가 몸을 갉아먹고 있다고 말하며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보살펴야 했으며, 시도 때도 없는 그녀의 분노와 폭언을 견뎌야 했다. 스탠리는 앤의 양극성 장애보다 그녀의 분노와 폭언이 상황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런 상황에서 스탠리는 (아들) 애덤과 함께 살아남아야 했다. 애덤은 스탠리에게 자신은 유년기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다. 적어도 엄마 앞에서만큼은 말이다. 애덤은 앤에게 매분 매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에 또래와 어울리는 것도 여의치 않았고, 스탠리는 때문에 언제나 애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항상 있었지만, 결국 애덤과 함께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스탠리의 몫이었다. 스탠리는 어느 순간부터 '앤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포기(339쪽)'했다. 그는 앤과 이혼하기로 했다.

3. 하우어워스가 견디는 법

인생이 이렇게 너덜너덜해도 스탠리는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가 삶을 견디는 방법은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보기에는 너무도 어색한 방법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신학자의 회고록, 심지어 저자 스스로 신학적 회고록이라고 여기는 『한나의 아이』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내 인생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도를 알면, 내 인생이 한결 편해 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스탠리의 모습이 정말 어색하다. 스탠리는 자기 삶의 세세한 사건과 고통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인생 속 시름을 이겨내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과 우정을 유지하는 것, 두 가지면 충분했다.

스탠리는 놀랍게도 단지 매일 해야 할 일들을 매일 하는 것만으로, 그의 삶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었다. 이는 그가 어릴 적 조적공의 아들로 태어나 배운 삶의 태도다. 스탠리는 "'현실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54쪽)".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채마밭을 일구고, 집 앞의 마당을 관리해야 했다. 또한 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할 때는 매일 야구공을 몇 시간씩 던졌다. 아버지의 현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등의 잡일과 조적일을 배울 때도, 그는 그저 매일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하우어워스가 아는 한 "현실에 가장 충실한 생활을 가리키는 단어는 일(54쪽)"이었다.

스탠리는 어릴 적 경험을 바탕으로, 앤의 질환에도 불구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교사로 살았으므로, 그는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다른 교수들과 어울리며 학위 논문을 지도했다. 현실에 충실하기 위해 '일'을 반복한 것이다. 노터데임에 있을 때 시작한, 자신의 글을 읽은 사람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고 답장하는 일도 꾸준히 이어갔다. 무엇보다 그가 가장 충실하게 반복한 일은 읽고 쓰기였는데, '사람들은 앤을 돌보고 애덤을 기르면서 어떻게 그러냐고 묻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그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읽고 쓰는 일이 중요(249쪽)'했다.

그가 인생을 견디는 또 다른 방법은 '우정'이었다. 스탠리 자신이 보기에도 '나는 우정에 은사가 있다(266쪽)'고 말할 정도로, 그는 '친구들' 덕에 그 인생을 견뎌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인생을 계속 견디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실존에 함몰돼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과도한 자의식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 덕에 이런 자의식 과잉과 나르시시즘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18쪽). 그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는다(22쪽). 그가 맺어온 우정을 통해 그는 그 자신의 인생을 견뎌내고 지금의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들 애덤은 스탠리에게 정말 특별한 친구였다. 앤을 돌보면서 그와 애덤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앤이 아프면 아플수록, 견뎌야 하는 인생은 스탠리와 애덤 언제나 두 사람 몫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두 사람의 우정이 평범한 부자 이상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한 인생을 견디기 위해 스탠리에게는 애덤이 필요했고, 애덤에게는 스탠리가 필요했다. 그 자신은 애덤이 스탠리를 필요로 한 것보다 오히려 스탠리가 애덤을 더 간절히 필요로 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282쪽).

스탠리는 학생시절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처음 만나고 나서부터 비트겐슈타인에 빠져들었고,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대화를 나눌 정도로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했다. 그는 그런 나머지, 자신의 삶을 견딜 때조차 비트겐슈타인스러웠다.

그는 신정론에 부정적이다. 스탠리는 인생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떤 답도 내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독교 신학자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누구도 그런(인생의 고통) 질문에 대답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375쪽)".

4. 스탠리 하우어워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될 의도가 없었(19쪽)"다. 그는 그가 알지도 못했던 어머니의 기도와 소망을 손에 쥐고 태어났고, 어머니가 했던 기도의 의미를 알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우어워스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알지 못했다. 그도 역시 '영문도 모른 채' 당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탠리 하우어워스로 만들어져 왔고, 스스로 의도치 않았어도 어쨌든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되었다. 그렇기에 스탠리 하우어워스에게 있어 인생은 견뎌나가야 할 수많은 사건들이 어쩌다 발생하고, 우연히 이어져서 만들어진 하나의 이야기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인생이 이런 우연 속 연결이 아닌,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필연적'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필요 없을 것이다. 내가 겪은 사건들의 결이 어떻든 간에 다 같을테니까. 그리고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신앙 언어의 의미를 시험하거나 결정(288쪽)'"하는데 쓰게 될 것이다.

나는 그의 인생을 따라가면서 일부러 스탠리의 '신앙고백'을 서술하지 않으려 애썼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어서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한다. '젠장, 내 인생은 왜 이따위인가'에 관한 답을 하나님이 갖고 계실 거라 생각하며, 그 뜻을 애써 찾으려고 한다. 분명히 '산다'는 단어보다 '견딘다'는 단어가 훨씬 더 어울리는 우리 인생에, 필연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그 뜻을 알고 깨달으면, 평안이 찾아올 거라 생각한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답을 쥐고 있는 것이 편하겠지만, 적어도 인생을 견뎌 나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오히려 더 큰 절망만 있지 않을까.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375쪽)"라고 말한 하우어워스의 고백(이를 고백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에 정말 크게 동의한다.

세상이 비명으로 가득하다. 한 사람 겨우 사는 방 한 칸이 눈물로 가득하다. 그 속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 괴로워, 소리치고 눈물을 흘린다.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우리에게 하우어워스는 "몰라도 괜찮다"고 말한다. 맞다. 몰라도 괜찮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안다 해서, 우리 인생을 더 잘 견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채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들을 그저 받아들여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너무 '슬퍼하는 나'에 매료되지 말고, 내 주변을 지켜주는 친구들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쌓다보면, 지금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그 사건들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그 안에서 하나 하나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권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