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명분론만 가지고는 중국과 전쟁에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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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6-11-11 12:27 조회32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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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군왕으로서 숭명의리론에 집착하면서도 국방 및 외교적 대비를 소홀히 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백성의 생명과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했다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10년, 후금과 조선에서는 상대방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분명한 점은 쌍방은 상대방의 조약 이행의 성실성 여부를 둘러싸고 상호불신, 오해 그리고 불만이 증폭되어갔다는 점이다. 후금으로서는 모문용의 제거가 실패했고 이 점에서 조선이 비협조적이었으며 명에 대한 대우에 비교해 볼 때, 아직도 조선 조정에서 후금을 배척·무시하는 척화론이 강화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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